「인커밍」 가을호 (특별기고) 기본소득의 정치, 정치의 기본소득
기본소득의 정치, 정치의 기본소득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오늘날 ‘기본소득의 정치’가 있는가? 기본소득의 정치를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지향하는 정치라고 읽는다면 분명 기본소득의 정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공유자 민주주의라고 부르건, ‘몫이 없는 사람들의 몫’으로서의 민주주의라고 부르건, ‘자유의 사전 분배’라고 부르건 간에 말이다. 또한 이는 사회의 정치를 넘어서서 생태의 정치 혹은 모든 존재의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기본소득의 정치가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 ‘정치의 기본소득’은 어떠한가? 사실상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 사라졌다는 말은 소실점에서의 사라짐도, 복수의 완결로서의 유령의 사라짐도 아니다.❶ 어디에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본사회 속의 기본소득, 아동 기본소득, 농민 기본소득, 여전히 있는 경기도 청년기본소득 등등. 하지만 이런 기본소득들이 ‘비개혁주의적 개혁’❷으로서 현 체제를 침식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현재로서는 전혀 아니다, 혹은 좋게 보아야 어떻게 피어날지 모르는 ‘맹아’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여러 요인과 조건들이 합쳐지고 교차하면서 발생했다. ‘피로 사회’ 혹은 소진 사회의 개인들의 우울증과 정치의 내선(內旋), 거대한 정치·사회적 과제와 무기력의 냉소주의, 스캔들로서의 정치, 공통의 정치 문화의 상실과 퇴행 등등. 그럼에도 이런 상황을 바꾸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면 기본소득의 정치를 말해야 하고, 정치의 기본소득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틈입(闖入)
길게 보면 1990년을 전후로 해서 자유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이 선포된 이후의 지형에서 기본소득을 상징하는 슬로건은 ‘기본소득은 좌도 우도 아니고 앞으로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 슬로건의 공간적 비유는 수사학적으로는 흥미롭지만 윤리적, 정치적, 전략적으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어디에 근거하며,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여러 대답이 있으며, 그 대답에 따라 우파 기본소득과 좌파 기본소득이 있고, 굳이 더하자면 중도파 기본소득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분할의 근거는 사적 소유의 (불)가능성,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 자유와 평등의 관계, 개혁과 혁명 등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런 패러미터는 근대 정치의 기본 구조 및 지형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본소득은 앞에서 인용한 슬로건과 상관없이 여전히 근대 정치의 에피스테메(인식 지반)와 지형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기본소득이 기존의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근대의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사적 소유권은 절대적 권리(자유주의) 아니면 절대적 불가능성(공산주의)이고, 여기에 더해 사회민주주의의 공적 제약이 있다. 하지만 토머스 페인에서 시작하는 기본소득은 이중의 소유권, 즉 사적 소유와 공동의 소유에 근거한다. 이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공동적인 것의 설정을 가능케할 뿐만 아니라 사회 혁명으로서의 공유지commons의 활성화와 공명한다. 또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대당을 넘어서는 공화주의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는 공적 개입의 부재 유무가 아니라 개인들의 자유의 토대에 주목한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근대 정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가 공히 인정하는 (고용) 노동의 중심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분배 체제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앞서 인용한 슬로건의 인상처럼 기본소득은 좌우를 넘어서는 것인가? 혹은 좌우로 나뉜 근대의 정치적 경기장에 틈입한 것인가?
다음으로 아이디어로서의 기본소득과 구별되는 정책 혹은 제도로서의 기본소득이 있다. 앞서 말한 것들이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부분이라면 정책 혹은 제도로서의 기본소득은 빙산의 일각처럼 날카롭고 또 빛나는 부분이다. 현실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투가 벌어지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며, 논점 가운데 하나가 실현가능성이다.
그런데 실현가능성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정책으로서의 기본소득은 다수를 획득하여 제도로서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 체제는 그대로인 채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체제를 동요시키는 말 그대로 틈을 여는 것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기본소득이 근대 정치의 에피스테메를 벗어나 있는 것이라 한다면 다수를 획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마 위기에 대한 인식과 전환의 요구가 없다면 기본소득은 불가능할 것이다.
기본소득 정치의 동요
기후변화라는 도전에 맞서면서 완곡어법이긴 하지만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로서 ‘전환’이 공론장에 들어왔다. 물론 오늘날 위기의 원인 혹은 책임이 어디에 있고,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전환의 정도를 생각하는 게 좀 다르긴 하지만, 전환을 말하는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보더라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전환은 매우 크고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기본소득의 위치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전환의 길을 여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전환 속에서 가능하다. 기본소득은 공유부에 기초하여 개인들에게 물질적 토대를 줌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고 사회적 책임의 감각을 키울 뿐만 아니라 세계를 공존의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배적인 패러다임, 즉 노동과 소유, (무)능력과 경쟁, 자연과 사회 등등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은 낯선 아이디어이고 따라서 정상적 시기라면 다수를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본소득을 징후로 보는 것은 우리가 위기의 시대, 탈구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분배 체제, 기존의 노동과 일의 체제, 기존의 정치 체제 등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부상을 통해 인식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이런 인식이 옳다면 지금은 거대한 사회 혁명의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인 사회 혁명의 길을 여는 게 정치 혁명의 역할이다.
이쯤에서 세기 전환기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가 채택한 비개혁주의적 개혁 노선을 살펴보자. 우리가 비개혁주의적 개혁 노선을 채택한 것은 아마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기본소득과의 조우에 기반을 둔 것인데, 전환은 기본소득을 통해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함으로써 empowerment 가능한 것이지, 위로부터의 단절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감안할 때 기본소득이 비록 낯선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그 필요성의 논변을 통해 정책 실현이 가능하다는 인식이다.
후자가 기본소득 정치가 보이는 진자 운동의 축이다. 그리고 진자 운동의 범위는 우리가 흔히 도입 전략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현실 속의 기본소득’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자 운동은 정치적 지형과 대중의 의식이라는 별자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 때문에 진자 운동이 기본소득의 정당성이라는 중력에 의해 제자리로 오지 않고 아예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
범주형 기본소득이 전국민 기본소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는가? 농민 기본소득 혹은 청년 기본소득의 위치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낮은 수준의 부분 기본소득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그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이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세 가지 배경 속에서 하려고 했다: 맥락, 수용성, 방향성. 우선 맥락을 보자면 범주형 기본소득이 방향성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오늘날 ‘청년 문제’라는 맥락에서 그리고 청년이 노동가능연령이라는 점에서 범주형 기본소득으로서의 청년 기본소득이 가능한 선택지이고, 수용성도 낮지 않다고 보았다. 맥락과 수용성은 일정 부분 겹치긴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용혜인 의원이 발의한 아동 기본소득의 경우 ‘저출생’ 시대라는 맥락이 있고, 이에 따라 수용성도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동 수당과 구별되는 아동 기본소득이라는 명칭 그리고 지급 연령대와 지급 액수 등은 수용성을 낮출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최근 부상하고 있는 에너지 전환(혹은 생태적 전환)과 배당이라는 정책은 맥락에서는 필요하고, 수용성도 낮지 않으며, 우리가 말하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관점에서도 적절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에너지 전환과 배당이 곧바로 전국민 기본소득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전국민 기본소득으로 가는 긍정적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개혁주의적 개혁: 정치의 기본소득
오늘날 비개혁주의적 개혁은 이중의 의미 혹은 위상을 가진다. 하나는 제도화된 민주주의 하에서 헌법적 가치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련의 조치들이다. 이는 앞서 말한 근대 정치의 패러미터, 즉 자유와 평등, 인간다운 삶, 민주주의의 확장에 근거하여 움직이는 게임이며, 따라서 현 체제의 가치와 실제 작동 사이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전환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생존하고,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시민적 역량을 키우게 하며, 이를 통해 장기적인 전환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소득만이 이런 개혁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기본소득은 가장 중요한 개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개혁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며, 이런 맥락에서 앞서 말한 것처럼 실현가능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따라 도입 전략이라는 토픽이 구성된다.
현재 한국의 기본소득 진영은 서로 평행하는 두 가지 도입 전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필요한 다른 개혁 조치에 기본소득 원칙을 도입하여 그 개혁 조치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기본소득 도입에 우호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에너지 전환과 다양한 형태와 근거를 가지는 배당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최대한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재원 마련 방안을 제시하면서 낮은 수준의 부분 기본소득을 즉각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의지이고, 이 의지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다수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다수를 형성하는 과정은 그 자체의 논리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일이다. 여기서는 정당성을 포함한 힘과 기술art로서의 정치가 필요하다. 문제는 어쨌든 개혁 조치를 관철할 힘이 부족할 때, 그로 인해 그 어떤 정치적 기술도 사실상 무의미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세 개의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되거나, 의심 많은 도마가 되거나, 새벽 전의 베드로가 되거나...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 된다는 것은 체제 전환을 위한 담대한 구상을 제출하는 것이며, 여기서 필수적인 것은 어마어마한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부의 (재)분배 문제로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라면 기본소득에 대한 값싼 지지에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정치적 변동이 거대한 전환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베드로의 교회가 비록 반석 위에 세워질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노와 공포, 배신과 회개라는 시련(?)을 겪고 난 다음의 일이다.
이런 선택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 메시아의 현존과 구원의 연기(延期)라는 일종의 정치 신학이다. 하지만 주체로 돌아오면 윤리의 문제가 되며, 제한되어 있는 소중한 시간에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다수를 획득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구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기본소득의 정치도 결국은 소명(召命)의 문제이다.
❶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부왕의 유령이 왕자 햄릿에게 나타나 자신이 살해당했음을 알리고 복수를 당부한다(편집자 주)
❷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개혁이 ‘개혁주의적 개혁’이라면, ‘비개혁주의적 개혁’은 비록 현재는 기존 체제 안에 이뤄지더라도 장기적으로 체제를 균열내고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개혁을 말한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