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Light 3월호 : 어떻게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를 강하게 하는가

어떻게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를 강하게 하는가
오준호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사명이 있는 나라』,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지은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사랑이 뭐길래’만큼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범위가 넓은 개념이라서다. 하지만 사랑은 무관심이 아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무엇이 아닌가? 독재? 그런데 독재자도 독재를 정당화하려고 민주주의 형식을 빌릴 때가 있다. 민주주의와 절대 헷갈릴 수 없는 것은 세습 신분제다. 왕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양반이 노비를 지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는 ‘정치적 평등’이다. 신분의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인민주권’이다.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인민(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2항에 박혀있는 대로다. 정치권력 행사는 헌법에 따라야 하고, 헌법을 만들고 고치는 최종 권한은 국민에게 있다. 그래서 인민주권은 곧 헌법 제정 권력이다. 정치적 평등과 인민주권은 민주주의의 두 기둥이다.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전체주의가 나올 수도 있다. 20세기 초 파시즘이 그것이다. 전체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에서 나왔을까?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익과 가치가 평등한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서로의 이익과 가치가 긴장, 갈등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불가피하다. 이러한 다양성이 공동체를 허약하게 만든다고 여기는 사람, 일체의 갈등을 없애줄 강력한 권위자를 바라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극우 선동가가 이들의 불만을 이용하는 데 성공하면, 파시즘이란 괴물이 나올 수 있다.
“정치의 핵심은 적과 동지의 구분이다.” 나치에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했다고 비판받는 정치사상가 칼 슈미트의 유명한 말이다. 칼 슈미트의 관심사는 인민의 동질성이다. 인민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서는 주권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런데 인민은 동질적이지 않다. 동질성을 만들기 위해선? 적이 필요하다. 공동체 외부의 적, 그 적과 내통하는 내부의 적에 맞설 때 인민은 동질해진다. 적이 안 보이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 칼 슈미트는 동질한 인민이 선출한 지도자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슨 결단이든 내릴 수 있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인민이 선출한 지도자는 의회 따위에 발목 잡혀선 안 된다. 지도자와 인민의 뜻이 일치함은 어떻게 확인하느냐? 지도자를 향한 열광적 갈채를 통해서. 그래서 이를 ‘갈채 민주주의’라고도 한다.
이렇게 전체주의 정권이 민주주의 형식을 빌려 나타났다. 그 정권은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저질러 인류에게 재앙을 남겼다. 2차 세계대전 후 서구 국가들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선 안 된다’고 합의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새로 정립했다. 서로 불신하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손을 잡았다. 본래 자유주의는 엘리트들이 국왕의 폭정으로부터 재산과 자유를 지키려 한 데서 출발한 이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경계했는데, 왕의 폭정 대신 ‘다수의 폭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다. 하지만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민이 바라는 복지 체제, 곧 사회민주주의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민주주의자도 재산권을 포함한 개인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자유주의 원칙을 지지했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된 자유민주주의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첫째, 개인의 기본권 보호다. 개인의 기본권은 국가 권력이나 다수의 결정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고, 국가는 기본권을 증진할 책임을 진다. 둘째, 법치주의다. 권력의 행사는 반드시 법에 의해 이뤄져야 하고 임의적이어선 안 된다. 셋째, 정당 민주주의다. 민주정치는 복수의 정당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서로 견제하는 정치체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계엄을 선포했다. 이는 정치 역사상 통치자의 가장 해괴망측한 결정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그가 내세운 ‘자유민주주의’는 인류가 합의한 자유민주주의 원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계엄 포고령 1호는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며 반대파를 처단하겠다고 위협했다. 통치자가 주관적 결단으로 초법적 권력을 행사해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고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막으려 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 네모난 세모일 것이다. 윤석열이 하려던 것에 굳이 이름을 붙이면 ‘반공 전체주의’다.
그래서 국민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내란 이전에 우리 민주주의나 헌법은 완벽하지 않았다. 시대에 맞춰 혁신하고 보완해야 할 곳이 많았다. 하지만 헌법은 각자 생각과 표현 때문에 감옥에 끌려가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경쟁하도록 보장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그것이 헌법이 가리키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다. 윤석열은 그 기초를 부수려 했다. 그래서 국민이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이 내란을 극복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내란 우두머리, 실행자, 부역자를 엄벌하는 건 기본일 뿐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회복하는 것도 기본이다. 우리는 그 위에 더 튼튼한 민주주의를 세워야 한다. 시민들의 삶과 자유 그리고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도전이 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위협, 극우 포퓰리즘
우익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를 연구해온 카스 무데는, 오늘날 극우 정치의 특성을 ‘극우의 주류화’라고 말한다. “이전까지 극우 정치는 주류 정당, 정치인 사이에 대체로 선을 넘는 일부 예외적 상황으로 취급되었으나 오늘날 더 이상 그렇지 않다.”(『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카스 무데, 2021) 윤석열 내란은, 커지기는 했으나 주류 정치의 담벼락 밖을 배회하던 극우 세력을 단번에 주류 정치 안으로 끌어들였다. 거대 양당의 한 축인 국민의힘은 극우 세력과 동맹했고,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극우가 반사회적 소수 집단일 때는 사회의 구석진 곳에 격리할 수 있다. 그런데 포퓰리즘과 결합한 극우 정치는 ‘파괴왕’이 된다. 이들이 설치고 다니면 판사는 재판을 공정하게 할 수 없고, 언론인은 비판 보도를 하기 힘들며, 정치적 소수자는 의견을 말할 때 항상 눈치를 보게 된다.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고, 포퓰리스트 지도자에 반대하는 정당은 공격당한다. 반대파 정치인에 대한 테러 위협이 위협으로 그치지 않는다.
포퓰리즘이란 사회를 ‘순수한 인민 대 부패한 기득권 세력’으로 나누고, 순수한 인민의 의지가 여타 규범적 법률적 제약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그 의지를 대변하겠다고 하는 운동이다. 순수하고 동질적인 인민의 의지가 존재한다는 건 환상이지만, 민주정치에서 어떤 정치세력이든 어느 정도 포퓰리즘 성향을 띠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극우 포퓰리즘은 차원이 다르다. 극우 포퓰리즘은 민주정치 자체를 공격한다. 민주정치의 기초가 되는 헌법, 의회, 야당, 민주적 투표로 선출된 다른 정치인들을 부정한다.
민주정치를 좀먹는 극우 포퓰리즘은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어둡고 축축한 흙에서 자란다. 불평등 정도를 뜻하는 지니계수가 한 단위 증가하면 극우 정당에 대한 지지도 1퍼센트 증가한다(유럽공공정책저널, 2021). 『불평등 트라우마』 공저자 케이트 피켓, 리처드 윌킨슨은 지니계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민주주의 침식 정도가 심해진다는 것을 밝혔다(영국 비영리단체 Equally Trust 보고서, 2024).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복지체계가 흔들린 유럽 국가들에서 이민자나 소수자를 희생양 삼는 극우 담론이 득세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는 긴축과 실업률 폭등 속에 ‘황금새벽당’ 같은 극우 세력이 부상했고, 독일 동부 등 경제 침체 지역에서는 난민 반대를 내세운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급성장했다. 미국에서 트럼프의 첫 당선 당시 러스트 벨트 지역의 산업 쇠퇴와 소득 감소가 그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경제적 좌절감과 불평등이 큰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자기 처지에 대한 분노를 극단적인 포퓰리즘 운동으로 표출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이는 바로 한국의 문제이다.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점점 빠르게 벌어지면서 사람들의 좌절감도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 가구 간 소득 격차가 처음으로 연 2억 원을 넘어섰다. 상·하위 10% 간 자산 격차도 15억 원 넘게 벌어졌다. 지난해 3월 말 기준 상위 10%가 전체 가계 순자산의 44.4%를 차지했다. 반면 하위 50% 가구의 순자산 점유율은 9.8%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추락하고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한국은 극우 정치 확산의 조건을 넉넉히 갖추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이민자나 무슬림 문제가 갈등의 핵심이 아니다. 한국에서 극우 세력은 반중국, 반민주당 그리고 부정선거 음모론에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차피 이런 정치적 소재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겐 수단에 불과하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틀리건 말건, 거대 교역국인 중국에 대한 혐오가 한국 경제에 도리어 손해를 입히건 말건 극우 세력에겐 중요하지 않다. 민주당과 야당의 총선 승리는 그 누구도 아닌 무능하고 오만한 윤석열이 만든 결과라는 사실도 중요치 않다. 극우 세력은 단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 모든 소재를 이용할 뿐이다. 문제는, 극우 정치가 미래가 불안한 많은 국민에게 그들의 좌절감과 불만을 분출할 통로가 되어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줄이려면 불평등과 경제적 불안부터 줄여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공동체에 연대 의식을 가지게 되고, 공동의 문제에 대한 민주적 해결 방식을 지지하게 된다. 불평등과 경제적 불안을 줄이기 위한 과감한 해법이 필요한 때다. 그 해법의 중심에 보편적 기본소득이 있다. 기본소득은 극우 포퓰리즘에 맞서는 희망의 방파제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자격심사나 노동 요구 등 조건 없이 정기 지급하는 현금이다. 보편성, 개별성, 무조건성은 기본소득과 다른 제도를 구별하는 특징이다. 이 중 제일 중요한 특징은 무조건성이다. 과도기적으로 기본소득을 청년이나 노인 등 특정 인구 집단에만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조건 없이 줘야 기본소득이라 하겠다.
기본소득 도입은 어째서 정당한가? 첫째, 최소한의 소득 보장은 인권이라서다. 누구든 살아가려면 일정한 소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자리 기회와 소득 활동의 여건은 동등하지 않다. 국가는 인권 보호를 위해 노동의 대가와 무관한 최소한의 ‘사회 소득’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 둘째, 모든 사람은 공유부(commons)에 대한 권리가 있다. 공유부란 한 사회가 자연에서 무상으로 얻은 각종 천연자원, 인류가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든 지식문화 자원을 가리킨다. 공유부를 개발하고 이용하여 창출한 수익에서 일정 몫은 모두의 몫이기에 모두가 나누어야 옳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공유부 배당’이다. 공유부 배당을 이미 지급하는 나라들이 있다. 잘 알려진 사례가 미국 알래스카주 영속기금 배당이다. 알래스카주 정부는 1980년대에 노스슬로프 유전을 공동자원 삼아 채굴 수익으로 기금(Alaska Permanent Fund)을 조성했고, 운용 수익을 연 1회 모든 알래스카 주민에게 지급하고 있다.
그러면 왜 기본소득이 현대 사회에서 더욱 필요해졌나? 우선, 삶의 안정을 일자리에만 의지하는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기술과 산업의 급속한 변화를 개인이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책연구기관에 의하면, 지금의 AI 발전 속도로 볼 때 일자리의 약 90%는 2030년 시점에 업무의 90%가 AI에 대체될 수 있다(한국개발연구원, 2024). 다음으로, 선별적 복지체계가 빈곤과 불평등 대처에 점점 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사회보장 체계는 크게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로 구성된다. 사회보험의 문제는 ‘역진성’이다. 상대적으로 고용과 소득이 안정된 이들이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받는다. 공공부조의 문제는 ‘낙인’과 ‘배제’다. 수급자가 된다는 건 가난하고 무능하다는 낙인이고,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이 엄격한 심사 때문에 배제된다.
일자리 위주의 안전망과 선별적 복지체계에서, 산업 변화의 충격을 가장 크게 받는 경제적 약자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 전략으로는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전환이 필요하나, 화석연료 산업이나 전통적 제조업 종사자들은 고용과 소득에 큰 타격을 입는다. 그들에게 새로 등장하는 첨단기술 일자리에 적응하라는 식의 해법은 좌절감을 주고 사회 갈등을 키운다. 경제적 약자들의 박탈감과 사회 갈등은 극우 정치에 땔감을 공급한다.
기본소득은 인권 원칙으로 시민을 묶어주는 안전망이다. 노동의 대가와 무관하게 사회가 제공하는 소득이자, 시민이면 누구나 받는 월급이다. 기본소득은 공유부 권리에 따른 공평한 분배다. 또한 사회 갈등을 줄이고 민주주의를 튼튼히 만든다.
기본소득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만들까?
첫째, 기본소득이 있으면 시민은 공적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다. 투표, 집회, 청원, 정당 활동, 시민단체 참여, 사회봉사 등이 모두 공적 활동이다. 실제로 생계가 안정되면 정치 참여가 늘어난다. 미국의 연구에 따르면, 빈곤 가구에 소득을 지원하니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투표율이 비교 그룹보다 10~20% 높았다(전미경제연구소, 2018). 한국에서 19대 대선의 경우에 소득 상위 20% 유권자가 90%가 투표하는 반면, 하위 20% 유권자는 60%만 투표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햇빛연금’을 시행하는 전남 신안군은 사전투표 투표율이 전국 지자체 1위를 기록했다.
반대로 소득이 낮고 불안정하면 개인의 권익 침해나 사회 불의를 봐도 더 소극적 태도를 취한다. 연구에 의하면, 본인의 이익이 침해되었을 때 시위에 참여하겠다는 비율은 소득 최하층인 1분위에서는 19%, 3분위는 24%, 최상층인 5분위에서는 30%였다. 사회 비리나 부정을 발견했을 때 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은 소득 1분위에서 25%이고 4분위와 5분위는 각각 31%와 35%였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1).
공적 활동 참여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시간과 에너지는 희소한 자원이라서, 먹고 사는 일이 바쁠수록 자원을 다른 데 쓰기 어렵다. 살기 힘들수록 사회에 무관심한 편이 이롭다는 ‘합리적 무지’가 나타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다수 시민의 삶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 정치권은 힘 있고 부유한 유권자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그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만든다. 그러면 양극화는 더 벌어지고 경제적 약자의 발언권은 더 위축된다. 민주주의는 허약해지고 극우 정치의 영향력이 커진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자기 권리와 사회 공공선을 위해 행동할 여유를 준다. 공적 활동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결사체 활동도 늘어날 것이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시민단체, 정당에서 활동하려는 사람이 더 많이 생겨난다. 생계가 보장되면 사람들은 부당함에 맞설 용기를 낸다. 이는 일터 민주주의, 마을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둘째, 기본소득은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공동체 통합에 기여한다. 선별적 복지제도의 문제점은 ‘혜택을 받는 사람 대 세금을 부담하는 사람’의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는 ‘재분배의 역설’을 일으킨다. 재분배의 역설이란 스웨덴 사회학자 코르피와 팔메의 이론으로, 저소득층에게 집중하는 복지제도일수록 오히려 빈곤 완화 효과가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수혜자를 좁게 설정하면, 혜택에서 배제되는 시민들은 복지재원 마련에 동참하기를 꺼린다. 그러면 재원이 더디게 확보되고 복지도 느리게 확충된다. 반대로 보편복지 체제에서 시민들은 모두 내지만 모두 받기에 더 흔쾌히 세금을 낸다. 이러한 보편복지의 챔피언은 기본소득이다. 조건과 심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같은 배를 탔다”는 연대감을 높인다. 2017~2018년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에서, 기본소득을 받은 그룹은 타인과 정부 기관에 신뢰가 높아졌고, 자기 미래와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졌다. 오픈리서치가 실시하고 2024년에 결과를 공개한 기본소득 실험(일명 ‘샘 올트먼 기본소득 실험’)에서, 기본소득 수혜 그룹의 소비 변화를 보면 ‘타인을 돕기 위한 지출’ 항목이 기본소득을 받기 전보다 26%가 증가해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인상적인 것은, 기본소득 수혜 그룹에서도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타인을 위한 지출이 더 컸다는 사실이다. 조건 없이 도움받고 행복감을 느낀 경험은 타인에 대한 신뢰로, 공동체적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 한국인들도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받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 신뢰는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강한 접착제다.
셋째, 기본소득은 경제적 불안정을 줄여 극단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차단한다. 기본소득 연구의 석학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경제적 불안정성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급증하는 원인”이라며, “기본소득의 장점은 이 불안정성(insecurity)의 해소”라고 말한다. 사회 갈등의 직접적 원인은 어쩌면 불평등보다 불안정이다. 불평등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 사이에 연대의식이라도 만들지만, 불안정은 오로지 각자도생 경쟁심과 고립감만 키운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수록 극우 세력의 선동에 취약해진다.
기본소득이 있는 사회에선 극우 정당이 흔히 쓰는 수법인 “저들(외국인, 여성, 장애인 등)이 당신 일자리를 뺏고 복지를 축낸다”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다. 사회적 안전이 갖춰지면 비난할 희생양을 찾기보다 건설적 담론에 관심을 갖는다. 기본소득은 극단주의에 대한 예방주사다. 분열의 정치에 대항할 면역력을 길러준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점이 있다. 극우세력에 반대하고 민주적 가치를 지지하지만, 시민 행동에 참여할 돈과 시간의 여유가 없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기본소득은 참여의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은 더 많은 민주주의 감시자를 광장으로 불러낸다.
따라서 “왜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돈을 주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복지를 재원 사용의 합리성 차원에서만 보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빈곤하지 않아도 불안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보면, 빈곤층만 구제하는 정책보다 모두의 불안정성을 낮추는 정책이 사회적으로 더 이롭다.
하버드대 스티븐 레빈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는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평등 해소는 단지 사회정의 문제만이 아니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생존이 달렸다.” 그들은 최저임금 인상, 의료보험 개혁과 함께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검토하자고 제안한다. 기본소득은 복지제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안전망이다.
민주주의 기본소득을 도입하자
『공유지의 약탈』 저자 가이 스탠딩은 “정부가 ‘증거 기반 정책 수립’에 진심이라면 이미 기본소득제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미 수년간 세계 곳곳에서 100개가 넘는 기본소득 실험이 실시됐다. 모든 실험에서 참가자의 건강, 교육, 사회관계, 경제활동 참여 정도가 개선됐다는 증거가 나왔다. 부족한 건 증거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다.
그러나 기본소득 도입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사람은 여전하다. 따라서 단계적으로 정교하게 계획을 짜야 한다. 코로나 재난지원금과 유사한 민생회복지원금을 연 1회, 지역화폐로 1인당 100만 원씩 지급하며 시작하는 것도 좋다. 경기 회복과 자영업자 지원에 도움이 된다. 범주형 기본소득을 순차적으로 도입할 수도 있다. 아동수당을 아동·청소년기본소득, 청년기본소득으로 확대하고, 이후 중장년도 지급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다. 지역 단위 시범사업으로 효과를 검증하고 전국화하는 방법도 있겠다. 또한 새 정부에선 서둘러 ‘기본소득 공론화’에 나서야 할 것이다. 시민 대표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기본소득 필요성과 재원마련 방안 등을 숙의 토론하게 하자. 이는 정책 도입의 민주적 정당성 확보에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민주주의 기본소득’을 실시하자. 내란 사태를 극복한 다음, 우리 정치문화를 혁신하는 데 안성맞춤인 해법이다. 민주주의 기본소득은 모든 유권자에게 정치후원금 용도로 쓰라고 제공하는 ‘바우처’다. 능력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 있는, 국민을 보고 일하고자 하는 정치인에게 이 바우처로 후원하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후원금 세액공제 제도에선 일정 금액의 납세 실적이 있는 사람만 자기가 낸 정치후원금을 10만 원까지 되돌려받는다. 소득이 면세점보다 낮은 학생, 청년, 주부, 비정규직 노동자는 혜택도 없다. 곧 정치 참여에 불이익을 본다. 민주주의 기본소득은 모든 유권자의 정치 참여 기회를 고르게 만든다. 또한 정당들이 고액 후원자 눈치를 보는 대신 평범한 다수 유권자의 뜻에 반응하게 한다.
기본소득 실현의 세 가지 모델
기본소득 연구자들은 이미 다양한 재원 마련 방안을 제시했다. 재원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 모델이 있다. 가장 정통적인 모델은 ‘조세형 기본소득’이다.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한다. 지급의 안정성이 조세형 기본소득 모델의 장점이다. 다만 충분한 액수의 기본소득을 주려면 증세를 피할 수 없다.
2022년 대선에서 기본소득당은 온 국민 기본소득 월 70만 원 지급을 공약했다. 예산 400조 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본소득 목적세를 도입하고 비과세감면제도를 정비하는 등 조세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이보다 온건한 수준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를 원상회복하기만 해도 민생회복지원금 같은 소액 기본소득 지급은 가능하다. 이렇게 시작하여 증세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밟아 충분한 기본소득으로 가면 된다.
두 번째 모델은 ‘공유부 배당형 기본소득’이다. 햇빛, 바람, 토지, 경관, 주파수, 데이터 등은 사회의 공유부다. 이 공유부, 혹은 공동자원을 지역공동체가 개발하면 그 수익의 일정한 몫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다. 전남 신안군은 태양광 발전수익을 ‘햇빛연금’으로 발전시설 인근 주민에게 배당한다. 신안군은 2018년 ‘신안군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 조례’를 제정하고 사업을 시작해, 2021년에 햇빛연금으로 21억 원을 지급했다. 태양광발전시설 규모와 주민 참여가 늘면서, 신안군은 2024년에는 햇빛연금 지급을 120억 원으로 늘렸다. 신안군은 해상풍력 발전시설을 완공하면 그 발전 수익도 합쳐 모든 군민에게 ‘햇빛바람연금’을 월 50만 원씩 지급하겠다고 한다. 이 같은 모델은 재생에너지 발전이 가능한 전국 어디에서나, 농어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 전라남도는 신안군 모델을 도 차원으로 확대한 ‘전남 에너지 기본소득’을 준비 중이다. 각 지자체는 재생에너지 말고도 지하수, 관광자원 등 공동자원을 활용한 공동체 기본소득을 다양하게 구상할 수 있다.
세 번째 모델은 ‘국민부펀드 기본소득’이다. 나라마다 천연자원, 외환보유고 등 공적 자산을 이용한 대형기금을 조성, 그 투자 수익으로 국고를 늘리고 있다. 이런 기금을 흔히 국부펀드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노무현 정부 때 국부펀드로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했다. 국부펀드는 주로 국외 주식, 채권 등에 투자해 배당금을 정부에 지급한다. 이에 비해 국민부펀드란, 국민이 소유하고 정부가 국민을 대신해 재원을 조달해, 그 투자 수익을 국민에게 배당하는 기금을 말한다(앞에서 말한 알래스카 영구기금이 대표적이다). 경제 강국이면서 독자적 국부펀드가 없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최근 이러한 국민부펀드 설립 제안이 활발히 나온다. 제안의 공통점은 거대 기금을 장기적 국가 미래 산업에 투자하면서 그 수익을 시민들에게 직접 배당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국민 모두 ‘평생배당’ 권리를 갖는 한국형 알래스카기금인 ‘한국연대기금’ 설립을 제안한 바 있다(『사명이 있는 나라』, 오준호, 2023).
최근 이재명 대표가 유튜브 방송에서 “K-엔비디아를 만들어 국민이 지분을 갖고 이익을 공유하자”라고 제안해 화제를 모았다. 이재명 대표가 말한 ‘국민펀드’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논의되는 국민부펀드, 또는 국민배당형 국부펀드와 같다고 보인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도 이 대표의 제안을 지지하며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AI와 재생에너지 기술 혁신에 국가가 인내 투자하고 수익은 기본소득으로 공유하는 모델이다. 이재명 대표의 제안에 보수 정치인들은 ‘반시장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는데, 국민부펀드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국민부펀드 모델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더 혁신적, 포용적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한 도전이다.
이러한 여러 모델을 이용해 기본소득 제도를 여러 층으로 쌓아보자. 조세와 국민부펀드 수익을 기반으로 1층에는 전 국민 기본소득을 둔다. 2층에는 지자체형 공동자원 배당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3층에는 마을 또는 도시형 기본소득을 얹는다. 당장 대규모 증세 부담을 피하면서도, 모두를 위한 경제적 안전 보장에 다가가는 길이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트로이 전쟁이 끝나 귀향하던 오디세우스는 저주를 당해 온갖 고초를 겪는다. 오디세우스가 통과해야 하는 바다에 무서운 바다 괴물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스킬라이고 다른 하나는 카리브디스다. 이 이야기에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라는 말이 나왔다. 스킬라를 피하려고 하면 카리브디스가 기다리고, 카리브디스를 피하려다 보면 스킬라에 당하게 된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는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뜻한다.
지금 온 민주 시민이 힘을 합쳐 윤석열 내란 세력과 싸우는 중이다. 윤석열의 파면은 변하지 않을 미래다. 하지만 그 뒤에도 극우 세력과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극우 세력을 경계하느라 과거의 질서로 되돌아가 버릴 위험이다. 극우 세력이 스킬라라면, 불평등과 불안정에 잠식된 기존 정치경제 체제는 카리브디스다. 극우 세력의 거름인 사회 불평등과 불안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또 다른 민주주의 위기를 예비하는 것과 다름없다. 제2의 내란을 막는 길은 과감한 정치경제 개혁에 있다. 불평등과 불안정을 해소하는 방법, 민주주의를 더 튼튼하게 만드는 방안은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이다.
우리는 ‘응원봉 연대’로 긴 겨울을 이겼다. 응원봉 연대는 2030 여성이 앞장서고 민주주의 회복을 바라는 모든 시민이 차이를 떠나 함께한 연대였다. 각자의 불안과 좌절을 넘어 뭉친 우리는 ‘윤석열 파면’을 함께 외쳤다. 윤석열이 파면되면 무엇이 민주 시민의 공통 구호여야 할까? 어떤 희망이 응원봉을 다시 연결하고,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까?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이름은 바로 ‘기본소득 대한민국’이라고 믿는다.
기본소득당 계간지가 더욱 가벼워진 '인커밍 Light'로 돌아왔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 속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시사평론을 담아 선보일 '인커밍 Light'를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