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 인커밍
【2023봄호】스토킹법, 가해자 처벌 넘어 피해자 일상 향해야 _윤김진서(기본소득당 기획국장)
계간지 「인커밍」
작성자
기본소득정책연구소
작성일
2023-04-28 11:25
조회
574
스토킹 법, 가해자 처벌 넘어 피해자 일상 향해야
윤김진서(기본소득당 기획국장)
6년 전 여름, 잠시 만났던 남성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다음 날부터 매일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 메시지와 모르는 사람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찍혔다. 얘기 좀 하자면서 그 남성은 며칠이나 연달아 내가 사는 곳 주변 카페라며 전화했고, 나갈 수 없다고 하면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협박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십 통을 넘어갈 즈음 모르는 사람에게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커뮤니티에 내 연락처가 올라간 것처럼, 저급한 내용의 메시지가 하루에 서너 개씩 내 휴대폰 화면을 채웠다. 학교 도서관 가는 길에 ‘섹파 구한다면서요?’ 같은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한 걸 보고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락처 하나를 차단하면 또 다른 번호로부터 문자가 왔다.
다음 해엔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듯 다른 일이 일어났다. 한 친구가 자신의 동아리가 함께 노는 날이라며 나와 친구들을 술집에 불렀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섞여서 즐겁게 놀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는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조금 어울려주니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작은 텀블러를 꺼내더니 내 술잔에 알 수 없는 액체를 따라주었다. 이 술집이 맛없는 술을 쓴다면서 자기가 가져온 술을 타서 먹어야 맛있다고 한참 설명했다.
고맙다고 억지로 대답하고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 술을 모두 버렸다. 친구들의 술잔에 있던 술도 모두 비웠다. 그를 피해 자리를 옮겼지만 그는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술자리가 파하고 친한 친구들과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자 그도 따라왔다. 늦은 새벽까지 그는 나와 친구들에게 자신의 술을 따라 마시라며 말을 걸었고, 그를 원래 알던 친구들이 제지하자 욕설을 뱉기 시작했다. 새벽 3~4시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따라오며 말을 걸고 욕을 뱉는 그를 다른 남성 친구들이 막아서고 우리를 모두 기숙사로 데려다주었다. 한 학기 내내 그가 있는 모임은 모두 피해다녀야 했다.
그때 나에게 왜 스토킹으로 신고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 당시 스토킹은 신고할 수 있는 범죄가 아니었고, 신고 후 더 큰 보복이 있을까 두려웠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토킹은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그에 비해 신고와 처벌은 너무 크고 어려운 일이었다.
스토킹 범죄는 국가가 할 일을 안 한 결과다
작년 9월 늦게 귀가하던 중에, 지하철 역무원이 사망했다는 속보를 보았다. 자세한 경위가 빠져있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다가,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기사를 봤을 땐 너무 참담했다. 그 전날도 SNS에서 스토킹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를 봤는데 또 스토킹이었다. 지하철 역무원인 피해자는 이미 두 번이나 가해자를 신고했는데도, 끝내 일터에서 그 가해자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지 거의 1년이 된 시점이었다.
스토킹 처벌법은 첫 발의부터 통과까지 무려 22년이 걸렸다. 많은 피해자들이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혹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죽음에 이르고 나서 이 처벌법이 제정됐다. 처벌법 제정으로 기존에는 경범죄 처벌법으로 겨우 신고할 수 있던 스토킹 범죄가 신고할 수 있는 범죄가 됐다. 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신고 현황을 보면 다시 숨이 턱 막힌다. 2021년 10월 21일 스토킹 처벌법을 시행하고 나서 약 1년간 2만 9천여 건의 신고가 접수되었다.* 매일 전국에서 85건의 스토킹 신고가 접수된 꼴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토킹으로 고통받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피해자 보호에 구멍이 많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다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설득해 처벌을 피해가도록 만들었다. 법률상으로는 수사기관이 피해자 보호를 위해 잠정조치와 긴급응급조치를 시행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해 실효성 있는 보호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벌법 시행 이후 1년간 피해자 보호 조치가 시행된 건수는 약 7천 건 수준에 머무른다.* 또한, 처벌법만 있고 피해자 보호 법안이 따로 없어 피해자가 신고 이후에 임시로 거처를 구하거나 법률적 지원을 받으려 해도 한계가 컸다.
스토킹 피해자를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구속하거나, 스토킹 처벌법상 잠정조치 4호 ‘유치장 또는 구치소에 유치’를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와 마주치거나 가해자로부터 위협받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스토킹 범죄의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집 주소나 회사 주소, 지인 연락처 등 내밀한 정보를 이미 많이 아는 경우가 많다. 언급한 내 사례에서도 그는 내가 사는 곳 주변 카페에 반복해서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골목에 그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매일 오가는 길마저 두려운 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스토킹이나 성범죄로 신고당한 피의자가 피해자를 다시 찾아가 위해를 가하는 사례도 많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가해자를 분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말이 필요 없다. 하지만 처벌법 시행 1년간 발부된 구속영장은 254건에 불과하며, 2022년 상반기(1~7월) 잠정조치 4호는 겨우 225건만 시행되었다.*
* [후속보도자료] 용혜인 “스토킹 신고 3.7배 증가했는데 스토킹 피해자 보호조치는 부실해”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기본소득당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잠정조치 4호의 높은 기각률을 반복해서 비판했다.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신청된 잠정조치 4호 500건 중 승인된 건(255건)보다 기각된 건(275건)이 더 많았다.* 그러나 잠정조치를 신청하거나 승인하는 경찰, 검찰, 법원 내부에 구체적인 판단 근거나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용혜인 의원이 국정감사를 통해 잠정조치가 기각되는 사유를 파악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경찰 등 피감 기관에서 그 이유를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이 없었다.**
**2022 행정안전위원회 경찰청 국정감사 (10월7일) 중
기관들조차도 스토킹 범죄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는 교육이나 교양이 없거나 제각각이어서, 피해자는 자기 사건을 담당할 경찰관이나 판사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배정되기만을 바라야 한다. 기관들이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은 까닭에 피해자 보호조치가 부실해졌다는 이 현실을, 또다시 누군가가 죽은 후에 확인해야 했다.
스토킹 법 너머,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해
스토킹 처벌법과 스토킹 피해 통계를 살펴보며 떠올린 생각은, 이 법을 만든 사람은 스토킹이 뭔지 모르나 하는 것이다. 피해자 보호법 없이 처벌법 덜렁 하나 있는데, 처벌법 안에 피해자를 보호할 방법이 너무나 부족했다. 피해자는 피해를 신고하기 전, 신고를 결심했을 때, 신고하고 나서, 수많은 위협에 노출된다. 그 위협을 법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22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안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여성가족부가 제출한 안을 포함해 총 4개의 법률안을 축조심사하는 자리였는데, 그 회의에서 여당 의원들과 여성가족부 차관이 보인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재판기관의 장이 스토킹 사건 담당자들에게 스토킹 예방교육을 실시하라는 조항, 피해자에게 임시거소를 구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지원하라는 조항에 대해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논의가 길어지자 “이런 식이면 올해 안에 통과 못 시킨다”며 피해자 보호법을 볼모로 피해자 지원을 축소하려고 했다. 그 광경을 보며 ‘스토킹 처벌법에 있는 수많은 빈틈이 이렇게 만들어진 거구나’ 한탄했다.
스토킹 피해자 보호도 마찬가지로 가해자를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중요하다. 피해자가 신고하고 나서도 원하는 곳에 살고 원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피해자가 보호 시설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야하지만, 시설만 해법으로 내놓으면 마치 피해자를 숨기고 감추는 것이 피해자 보호라고 읽힐 위험성이 있다. 임시거소를 지원하거나, 피해자가 원하는 곳에 임시거소를 구하도록 비용을 지원해 피해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피해자 보호다.
이번에 통과된 피해자 보호법에서는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임시거소 지원이 ‘피해자 보호 시설의 의무’ 조항에 축소되어 들어갔다. 그러나 앞으로는 피해자 보호가 단순히 가해자를 피하고 피해자를 감추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일상을 원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스토킹 범죄는 분명 큰 사건이지만, 스토킹 따위가 피해자의 존엄한 일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신고 이후의 삶을 국가와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
어렵게 본회의를 통과된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은 올해 6월부터 시행된다. 법 제정 과정을 지켜봐서 그런지 기대보다 걱정과 우려가 더 큰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제 스토킹 처벌법과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을 모두 갖춘 만큼, 피해자의 관점에서 무엇이 더 필요한지 꾸준히 파악하고 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 스토킹 처벌 목적도, 피해자 보호의 의미도 지금의 한계를 넘어 피해자의 일상과 권리 회복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확장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과거의 나를 자주 떠올렸다. 당시 내가 스토킹 처벌법으로 가해자들을 신고하고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에 따라 보호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잠정조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답답하고, 답변 없는 지원시설보다 주변 친구나 사회단체에게 더 큰 도움을 받고 국가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생겼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위가 단순히 ‘좋아서 하는 행위’나 ‘조금 과한 애정’이 아니라 범죄라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을 것이다. 나의 불편함과 두려움이 유난함이나 예민함이 아니라 ‘피해’라는 말이 나를 해방시켰을지 모른다.
스토킹 범죄든, 어떤 젠더폭력이든 피해자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법과 제도가 놓친 수많은 공백에 대해 조금 더 나은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