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가을호 (문미정의 기본소득 人터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을 만났다
문미정의 기본소득 人터뷰 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을 만났다
문미정(최고위원)
기본소득당 당원은 어떤 사람일까? 기본소득이 불가피한 시대 흐름이라 믿는 사람, 작지만 힘찬 정당 기본소득당을 응원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떤 이유와 계기로 당원이 되었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문미정 최고위원이 당원을 만나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를 연재하려 한다. 젊은 정당인 기본소득당에서 최고령 당원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35년생으로 올해 89세인 이구철 당원을 만났다. 이구철 당원은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1970~2000) 현재 명예교수이다.
최고령 당원과 무슨 말부터 시작하나. 일단 만나 수다를 떨어보자 싶어 전화를 했다. 이구철 당원의 차분한 말투에서 따뜻함이 느껴져서 ‘시작이 좋군’이라는 생각에 내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이유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있어서 우선 본인의 블로그를 보면 좋겠다고 하여, 인터뷰를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안고 통화를 마쳤다. 하지만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았다. 블로그엔 그의 삶과 생각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❶ 아래 다른 서체로 표기한 부분은 이구철 당원 블로그에서 발췌했다. 인터뷰는 블로그를 바탕으로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삶의 궤적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의 삶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후반인 1935년에 일본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은 어떤가. 어쩌면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살다 간”이란 부제가 붙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그 영향으로 집안이 폭삭 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 오사카 대공습을 피하여 초등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진급하던 해 부모를 떠나 지금의 의정부시가 된 양주의 첫째 누님의 시가 사돈집에서 낯선 고국생활을 시작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 일본이 패망하자 이구철 당원은 부모와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됐지만, 잠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6남매 중 4명만 남았다.
일본이 패망하고 귀국한 부모님을 만났지만,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병으로 누우신지 1주일만에 세상을 뜨셨다. 난 아직도 10번째 생일을 맞기 전이었다. 한반도는 둘로 갈라졌고 좌우 대립이 심각하던 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3학년에 진급하던 해 625전쟁이 터졌고 우리 집은 또 한 번의 폭망을 맞는다. 6남매 중 둘이 행불이 된 것이다.
큰형은 동경 유학 중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다행히 살아 돌아왔고 결혼까지 했다. 그런데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6.25가 터지면서 형수와 두 아들을 두고 사라졌다. 전쟁통에 사라진 형이 자의로 월북했는지 납북되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가족이 온갖 고초를 겪었고, 결국 형의 아들들이 형수를 모시고 이민을 가버렸다. 다섯째인 누나도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 몇 번 인민군을 따라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집을 나갔다. 역시 생사도 월북 여부도 모른다.
나중에 이태씨가 쓴 다큐소설 ‘남부군’을 읽었습니다. 남쪽에 있던 인민군은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집결하여 남부군으로 재편합니다. ...거기에는 서울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인민군을 따라나선 한 처녀가 등장합니다. 열아홉의 나이입니다. 누나가 인민군을 따라 나섰을 때 나이가 바로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이 처녀 역시 타의에 의하여 지리산의 여자 빨치산이 되어 종래에는 피아골의 외로운 혼령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누나였는지 모른다고요.
무서운 운명의 갈림길
물리학자를 꿈꿨지만 그는 대학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가난한 그에게 사관학교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지원을 받아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고, 해사를 나올 결심을 했지만 학교는 자퇴를 받아주지 않았다.
1954년 11월 어느 날 아침 난 몰래 사관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탈영을 했다. 음주 흡연도 거의 퇴교에 가까운 과실점을 매긴다. 난 저녁에 진해 시내에 들어가 막거리를 사서 마시고 필 줄도 모르는 담배를 사서 몸에 지니고 교문을 통해 사관학교에 들어왔다.
고민 끝에 최대한의 과실점을 받으려 행동한 것이다. 과실점으로 퇴교 처분을 받으려고 탈영까지 했지만 교장은 그를 회유했고, 이를 거부하자 일은 커졌다.
교장은 내가 자기의 회유를 거부하자 격분하고 휴전은 휴전일 뿐 아직도 전시라는 것이다. 전시의 탈영은 최고 총살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라고 위협하고 사관생도는 준사관이니 고등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해병대 영창에 수감시켜 버린 것이다. 그때 난 겨울 19번째 생일 지난지 며칠 안 된 아직도 청소년일 때였다.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자서 영창에 갇혔던 그 때를 그는 가장 무서웠던 시기로 회고한다. 그러면서도 그 겨울의 용기를 후회하지 않는다.
1954년 겨울 내가 용기를 내지 않고 머뭇거렸다면 나는 결국 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그 길의 종착점 근방을 서성이며 “그때 난 물리학자가 꿈이었는데...” 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인연의 빨간 실
어렵게 자유를 얻은 그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갔고, 1960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년도 안 되어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운명적인 만남’, ‘생애 가장 큰 행운’이라 이야기한다. 부부는 첫 데이트를 하고 결혼하기까지 2개월 16일이 걸렸다고 한다. 엄청난 스피드다. 중국 설화에선 짝이 되는 남녀는 태어날 때 빨간 실로 이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워싱턴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우연히 아내를 시애틀에서 만난 것은 유학 첫해 겨울 크리스마스 전후였다. 아내는 동부 버지니아대를 가려다가 워싱턴대로 진로를 변경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한국 집은 서울 혜화동에서 35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국에 살 때는 알지도 못했다가 미국 땅에서 만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열애에 빠졌다. 우리는 잠시도 떨어지기 어려운 연애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아내는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어 아예 봄학기 등록을 취소하고 말았다. 나는 학교에서 조교를 맡고 있어 등록을 취소할 형편이 못되어 간신히 중간시험과 기말시험을 쳤다. 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 학기 중이라도 결혼을 해서 안정을 찾으려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학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1961년 6월 16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첫 데이트한 날로부터 2달 16일 후였고 첫 만남에서부터는 여섯 달도 채 못되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혼을 앞두고 동성동본금혼제도로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2005년 3월 31일에서야 민법 개정으로 동성동본금혼제도가 폐지되었다). 아내의 가족들은 결혼에 크게 반대했다.
아내는 부모뿐 아니라 부모가 동원한 친척에게서까지 결혼을 반대하는 편지를 받았다. 아내는 “우리는 여기서 결혼하고 여기서 아이를 낳고 여기서 영주할 생각”이니 동성동본문제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되받았고 더 이상 결혼 반대 편지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 날짜를 잡아 우리가 만든 청첩장을 결혼통지서로 우송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1961년 한국과는 상용 국제전화도 없을 때였기 때문에 편지에 답장을 안하면 아내의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싸구려 결혼반지와 목사님 사례비 10불이 결혼비용의 전부였다.
결혼 이후 아내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사서로 취직하였고, 그는 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모든 것이 잘 풀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
이구철 당원은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왔고, 서울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연구에 매진하고 학과를 꾸려가면서도, 그는 그 시절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기억한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혁명(?)으로 동숭동 문리대 정문에 탱크가 막아선 것을 보았다. 계엄령으로 학교가 문 닫아 모자랐던 수업을 보충한다고 구정날에도 나와 강의를 했던 일도 있었다. 관악산으로 캠퍼스가 모두 모였던 해가 1975년이었던가? 거기서도 우리는 매캐한 최루탄을 맡으며 살았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7년간 데모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난 그래도 열심히 연구를 했다. IMF도 겪었고 나는 금붙이 모두를 내놓아 이젠 금붙이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정년퇴임식에서 후배 교수에게 한 인사말 가운데 난 “I am the happiest boy in the world”라고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한 문장을 되씹었었다. 그렇게 즐겁게 내 인생의 절정기를 보냈다.
2001년 초 정년퇴임을 한 후에도 이구철 당원은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실제로 그는 퇴직 후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해왔다. 퇴직 직후인 2000년대 초 물리학을 설명하는 영상을 플래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대중과 공유했다. 옥상정원을 가꾸고, AI를 연구하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배운다. 은퇴 후 부부는 함께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하고 세계여행을 했다. 최근에 이구철 당원은 드론 조종을 연습하고 챗지피티와 토론한다. 쉼 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험하는 그가 진정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일지 모른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다, 기본소득당을 만나다.
이구철 당원은 2021년에 기본소득당에 가입했다. 당은 물론 용혜인 의원도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다. 이때 그는 기본소득당에 어째서 가입했을까? 블로그를 읽다가 의문이 풀렸다. 이미 2018년부터 그는 여러 차례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쓰고 있었다. 물리학자로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 대안을 고민한다. AI가 가져올 세상이 디스토피아일까 두려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그 걱정을 덜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의하면 1970년대 이전에는 소득 증가가 전 계층에서 이루어졌으나 이후에는 하위 90% 계층은 소득이 정체되고 있다. 또한 디지털 경제환경 속에서 승자독식의 부의 편중이 가속화 되고 있다. 소득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으며 새로운 경제가 창출한 부를 전 인류가 공유하는 ‘부의 공유’가 필요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보편기본소득(UBI)이다. UBI는 모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일정액의 월급을 준다. 지금의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복지시스템은 비효울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 복지는 돈 받는 사람들이 일할 생각을 안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일할 의욕을 강조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구철 당원은 물리학을 사랑하는 학자로서 인류에 도움을 줄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다. AI와 로봇의 도움으로 인간은 더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한다. 그래서 보편적 기본소득의 도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외롭게 투쟁하는 용혜인 의원을 지원하려고 당원 가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생겼다.
이구철 당원의 생애를 따라가는 동안 세상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드라마 를 보다가 70년 전 탈영할 수밖에 없던 때를 떠올리며, 세상이 변해가는데도 변하지 않는 군대의 폐습에 화를 낸다.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미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의 끝을 고민하면서 지구 생태에 대한 고민도 나눈다.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누나들이 또 아내와 딸들이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이다. 아직도 그 인습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오는 세상에서는 이 땅의 여성이 더 이상 아프고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산분장(散粉葬) 인데 아직도 이것은 제도화되지 않았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내가 이 세상에 왔으니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살다 간 자취를 지우고 지구환경에 후유증을 남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리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지 Physical Review Letters에 단독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물리학자가 기본소득당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니, 그 자체가 흥분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보다 그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를 멈추지 않으며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계속 고민하고 답하고 소통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나에게도 존경할 만한 어른이 생겼다.
에필로그
‘평범한 당원의 소소한 이야기’를 적어보려 했는데, 이구철 당원의 삶은 평범하지도 소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본소득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는 것부터 ‘평범’하거나 ‘소소’하지 않다. 그러니 다음 인커밍에서도 당원들의 ‘특별한’ 인생을 열심히 소개할 생각이다.
❶ https://boris-satsol.tistory.com/ (지구별에서-Things Old and N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