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봄호】오준호의 기본소득 리스타트
오준호의 기본소득 리스타트
오준호 기본소득당 공동대표가 인터넷매체 중기이코노미에 ‘기본소득 리스타트’라는 코너명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행한 칼럼 두 편을 ‘인커밍’에 소개합니다.
칼럼 하나. ‘햇빛연금’…기본소득사회로 가는 다리 될까
인구 290명 남짓인 전남 신안군 자라도. 그곳에 있는 자라분교는 올해까지 3년째 신입생이 없어 폐교가 확실시됐다가, 취학 연령대 아동 15명이 새로 전입하면서 폐교 결정이 연기됐다. 인구유입 계기는 신안군이 재작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햇빛연금’이다.
햇빛연금은 신안군이 2018년에 제정한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기업이 폐염전이나 폐양식장에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할 때 지역주민이 지분 참여를 통해 발전수익 일부를 배당받는 제도다. 24MW 태양광발전소가 설치된 자라도는 주민 1인당 분기별 최대 51만원(연 204만원)을 지급받는다. 자라도가 속한 안좌면은 햇빛연금 시행 후 인구가 65명 이상 늘었다. 햇빛연금이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린 셈이다.
신안군의 시도는 그 자체로 지역소멸 위기에 대응하는 주목할 만한 사례다. 이에 더해 ‘기본소득사회’로 나아가는 데 튼튼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지역소멸 넘는 햇빛연금
기본소득제도의 목표는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경제적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충분한 수준으로 기본소득을 보장하려면 상당한 재정이 든다. 조세 수입으로 이 재정을 충당하려면 매우 급진적인 증세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세금 부담을 확 높이기 어려우니 기본소득의 현실 가능성에 대해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반드시 조세만으로 할 필요는 없다. 지역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공동자원을 활용해, 그 수익을 공동체 차원 주민배당으로 지급할 수 있다. 그 이름은 햇빛연금, 바람연금, 지하수배당, 생태보전배당 등 다양할 것이다. 지역 특색 기본소득인 셈이다.
공동자원은 우리 곁에 넘쳐난다. 토지, 지하자원, 햇빛, 바람, 물, 공기처럼 자연이 준 선물이 공동자원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협력하며 축적한 지식, 문화, 문화재 등도 공동자원에 포함된다. 공동자원은 모두 공유한 부(富)라는 뜻에서 ‘공유부’라고도 한다. 공동자원은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기에 이 선물을 이용할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또한 공동자원을 이용해 발생시킨 수익에 대해 공동체 성원은 자기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사상을 구현한 실제 사례는 해외에 여럿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 알래스카주는 노스슬로프 유전에서 발생하는 석유 판매수익을 토대로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만들어 1982년부터 매년 1회, 알래스카에 1년 이상 거주한 모든 시민에게 주민배당을 지급한다. 몽골은 광물자원 개발이익으로 ‘인간개발기금’을 조성해 2010년부터 아동보조금을 지급했다. 설계상 문제로 보조금 정책은 3년만 지속됐지만 빈곤율을 크게 낮췄다. 볼리비아는 2008년부터 천연가스 판매수입의 30%를 재원으로 삼아 노령연금제도를 시작했다.
햇빛연금은 신안군이 제정한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기업이 폐염전이나 폐양식장에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할 때 지역주민이 지분 참여를 통해 발전수익 일부를 배당받는 제도다.
햇빛연금과 같은 사례가 늘어나면 기본소득제도를 여러 층으로 구성할 수 있다. 1층에는 조세를 기반으로 하는 전 국민 보편적 기본소득제도를 둔다. 그리고 2층에는 공동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주민배당을, 3층에는 다양한 소규모 공동체 주민배당을 얹는다. 이처럼 제도를 결합하면 ‘모두의 경제적 안전’이라는 목표는 더 빨리 앞당길 수 있다. 따라서 지역의 이러한 사례에 주목하고, 이를 확산할 국가 차원의 지원방안을 찾아야 한다.
신안군의 사례가 특히 중요한 것은 기후변화와 고령화·지역소멸이라는 두 개의 위기에 동시에 대응하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생에너지 발전에도 환경문제 등 논쟁이 있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 없이 탈탄소 및 탈원전 사회로 갈 수 없고, 에너지 전환을 앞당기려면 지역주민이 참여해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신안군에서도 처음에는 지자체를 믿지 못하는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군수가 소신을 가지고 이들을 설득해냈다.
먼저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한 자라도와 안좌도에서 2021년 4월부터 주민배당을 시작했고, 올해는 다섯 군데 섬에서 제도가 시행된다. 2024년에 여덟 섬으로 확대되면 전체 군민의 45%가 배당을 받는다. 신안군은 8.2GW 해상풍력단지도 2030년까지 조성할 계획인데, 역시 주민참여방식을 통해 1인당 연 최고 600만원까지 배당받게 된다.
제주 역시 주목할 만하다. 천혜의 공동자원이 풍부한 제주는 난개발과 사유화로 많이 파괴됐어도 여전히 마을공동체 단위 공동자원 관리제도가 남아있다. 어떤 마을은 공동목장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해 그 수익을 장학금이나 노령연금으로 지급하고, 어떤 마을은 국가 소유의 생태습지를 공동자원으로 여겨 관리하면서 생태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해 수익을 창출한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 도민의 생명수인 지하수를 제대로 관리·보존하면서 지하수 이용수익을 도민에게 배당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먹는 샘물 ‘삼다수’의 판매수익을 제주개발공사는 제주도에 매년 170억원씩 배당하는데 제주도는 이를 일반예산에 편입해 사용한다. 그러나 지하수가 공동자원인 만큼 ‘제주삼다수 주민배당’ 같은 방식이 옳다는 지적이 있다. 제주에서 경기도처럼 ‘청년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경우 예산은 연 87억원인데, 삼다수배당으로 경기도보다 넉넉한 제주도 청년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청년 유출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공유지 비극’ 넘는 공유부 주민배당
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에 대해 공동체적 참여와 관리로 공유지의 풍요를 유지할 수 있음을 다양한 실례를 들어 입증했다. 공유지를 사유화해 개별 관리에 맡기거나, 반대로 국가가 위로부터 통제하는 해법밖에는 없다는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엘리너 오스트롬, ‘공유의 비극을 넘어’).
그의 통찰에 따르자면, 공동자원 기반 주민배당은 단지 기본소득제도의 재정 마련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성원들이 공동자원의 가치 및 자기 삶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공동자원의 회복과 보전에 참여할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공동자원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기후위기의 해법을 찾고, 모두에게 경제적 안전을 보장할 기본소득의 실현도 앞당길 수 있다.
(2023년 3월 28일 발행)
칼럼 둘. 챗GPT, AI 혁명…‘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챗GPT에게 “사랑하는 연인이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장면을 시나리오 형식으로 써달라”고 요청해보았다. 놀랍게도 챗GPT는 몇 초만에 다음처럼 시작하는 대본을 만들어냈다.
기차가 도착하자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남자] 정말 떠나는 거야? 우리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여자] 미안해. 그 약속은 이미 끝났어. 우리가 함께한 추억은 영원할 거야….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의 대답에 틀린 사실이 많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영역에선 그건 별 문제가 안 된다. AI는 정보 제공이나 비서 역할을 넘어 예술 창작자까지 넘보고 있다. 이런 챗GPT가 사회에 준 충격은 2016년 ‘알파고’ 등장 때보다 훨씬 크다.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 시합은 그저 지켜봤을 뿐이지만, 챗GPT는 수억 명이 직접 사용해봤기 때문이다.
AI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확실한 건, 그것이 인간 노동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리란 것이다. 따라서 ‘알파고 충격’ 당시 제기된 질문을 우리는 다시 진지하게 꺼내게 된다. AI가 인간 노동을 대신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얼 해야 하나? ‘일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AI가 발달한다고 인간 일자리가 대번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자리의 양이 유지되더라도 열악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로 채워질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극단적으로, AI의 작동을 떠받치는 노동과 AI에 의해 철저히 통제당하는 노동만 남을 수 있다.
이미 고스트 워크(ghost work)라고 불리는 ‘숨은 노동’이 AI 작동을 떠받치고 있다. 챗GPT가 윤리적으로 적절한 대답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윤리적으로 해로운 데이터를 따로 레이블링해서 AI에게 학습시켜야 하는데, 그 레이블링 작업은 저임금으로 고용된 케냐 노동자들이 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같이 살인, 폭행, 범죄에 관련한 정보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한편 세계 최대 유통업체 아마존의 노동자들이 하는 상품 분류작업은 AI에 의해 작업 속도와 강도가 완벽히 통제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일자리라도 얻으려 경쟁하는 것이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라면 끔찍하다. 우리가 진짜 바라는 건 AI의 도움을 받으며 더 창의적인 노동에 종사할 기회, 또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일’을 찾을 자유다.
AI 시대, 더 나은 ‘일의 미래’에는 기본소득이 필수
AI를 똑똑하게 만드는 재료인 데이터를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제공했다면, 그들은 AI가 창출한 수익에도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어떤 방식이든, AI가 만든 수익의 정당한 사회적 분배 방식을 서둘러 합의해야 한다.
의미 있는 일이란 어떤 일일까? 19세기 말 사회주의자이자 예술가적 장인인 윌리엄 모리스는 ‘모든 노동이 예술이 되는 사회’를 꿈꿨다. 일은 즐겁고 예술적인 행위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과도하게 힘들거나 불안한 작업 조건은 사라져야 한다. 그는 인간이 일을 예술 행위처럼 할 수 있을 때, 삶도 아름답고 이성적으로 변하리라고 보았다. 이에 더해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의 요소에 작업의 자율적 통제 가능성, 사회적 인정과 존중, 공동체에 기여하는 효능감 등을 추가할 수 있다.
AI의 통제 아래 대다수 사람이 열악하고 소외된 노동을 반복하고 AI가 창출한 이익은 극소수가 차지하는 미래와, AI를 인간에게 봉사하게 만들고 인간은 초생산성의 혜택을 누리며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미래. 두 미래 가운데 당연히 더 나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기본소득에 주목한다. 후자의 미래로 가는 핵심수단이라서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다. 소득은 노동과 단단히 연결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상식에 도전한다. 충분한 기본소득이 제공되면, 사람들은 열악하고 보람 없고 자존감 떨어뜨리는 노동은 거부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이라면, 기업과 정부는 노동자를 불러들이기 위해 더 넉넉한 보상과 작업환경 개선을 약속할 것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시간자본’을 얻게 되고, 이를 활용해 적성에 맞는 일을 탐색하고 역량을 계발해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이동할 것이다. 기본소득 이론가 파레이스(Parijs)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알고 있으며,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금전보다 ‘자체의 매력’ 때문에 일을 선택할 수 있어 ‘좋은 일’이 사회에 늘어나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기본소득 보장에는 막대한 재정이 든다. 이 재정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런데 우선 AI가 만들어내는 수익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질문해야 한다. 시중에 이미 챗GPT가 저자가 돼 지은 책들이 팔린다. 이 책의 인세는 누구에게 지급해야 하는가?(이런 종류의 책을 낸 출판사 한 곳은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AI의 성능은 인터넷에 공개된 대규모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 결과다.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조성해낸 원천 데이터를 가지고 수익을 발생시켰다면, 그 수익 전체를 인공지능 소유주나 인공지능을 활용한 기업이 다 차지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고 방대한 데이터에 포함된 개별 데이터에 일일이 보상할 수는 없다. 원천 데이터를 ‘공유부’로 보고, 이를 활용해 얻은 이익 일부는 ‘모두의 몫’이니 사회적으로 환원하도록 하는 것이 낫다.
지난 대선에 필자는 기본소득당 후보로 출마해 ‘데이터배당 기본소득’을 공약했다. 구글이나 네이버 등 빅테크기업이 빅데이터를 활용해 얻은 초과이익 일부를 ‘데이터세’로 거둬들여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으로 주자는 것이다. AI를 똑똑하게 만드는 재료인 데이터를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제공했다면, 그들은 AI가 창출한 수익에도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어떤 방식이든, AI가 만든 수익의 정당한 사회적 분배 방식을 서둘러 합의해야 한다.
1960년대에 제작돼 몇 번이나 리메이크된 SF 드라마 ‘스타트렉’에서, 인류는 물질적 궁핍과 생계노동에서 해방되자 우주로 모험을 떠난다. AI의 놀라운 발달에 더해 국가의 혁신적 역할과 기본소득이라는 과감한 분배 제도가 만난다면, 우리의 미래에도 위대한 모험의 시대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2023년 3월 7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