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가을호 ① 시론 <기본소득 정치의 때는 오는가>
시론 – 기본소득정치의 때는 오는가
오준호(기본소득당 공동대표. 「인커밍」 발행인)
- 주권행사가 무정부상태라는 궤변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열한 인간들에게 지배받는 것이다.” 플라톤이 저작 「국가」에서 한 이 말은 오늘날 선거나 집회에서 정치 참여를 호소하는 말로 쓰지만, 플라톤의 본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플라톤은 귀족주의자로 평민들의 통치 곧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교육받은 현자(賢者)가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 말은 귀족들을 향해 ‘너희가 정치를 외면하면 무식한 평민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경고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늘날 대놓고 플라톤식 귀족 지배 즉 귀족정을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9월 6일 대정부질문에서 김영호 통일부장관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 장관은 헌법 조문의 해석을 놓고 “5천만 국민이 모두 주권을 행사하면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라고 말했다. 국민은 정부를 선출하여 주권을 위임하였으니 주권의 주체는 정부라는 말이다. 이를 부정하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려 하면 무정부상태가 되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강조하다 나온 말이라고 이해해줄 수도 없다. 국민주권론을 사실상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전문은 헌법 제정의 권능이 ‘대한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밝히고, 제1조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못 박았다. 국민이 정부에 준 것은 주권이 아니라 통치권이며, 그것도 삼권분립된 통치권의 일부인 행정적 통치권이다. 정부가 있는 것도, 정부가 통치하는 것도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선출됐으니 주권이 정부에 넘어왔다고 하는 김 장관은, 플라톤식 귀족정을 주장하는 것에 가깝다.
윤석열 정부를 보며 ‘이들이 바라는 건 귀족정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장면은 이뿐이 아니다. 일단 이들은 야당을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법안을 통과시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인재가 확실한 재난 참사가 벌어져도 고위직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 동정의 눈물은 지을지언정 책임지는 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후쿠시마 핵오염수 투기 문제는 어떤가. 국민 다수가 반대하면 어떻게든 반응하기 마련인 민주정치의 관습조차 이들은 따르지 않는다. 통치 방식은 자기들이 정하는 것이니 나머지는 따라오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차마 ‘귀족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고대 귀족정은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그러한 ‘사명감’이 현 정부와 여당에겐 전혀 안 보인다. 국가의 미래 방향에 대한 고민도, 그 방향으로 가려는 의지나 책임감도 현 집권 세력은 없다.
세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가. 기후변화가 위기를 넘어 재난으로 닥친 시대, 각국은 정해진 기간에 탄소중립과 녹색전환을 이루려고 총력을 다한다. 대기업 법인세 인상과 횡재세 신설로 재원을 마련하고 그 재원을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보에 쏟아붓는다. ‘사명 지향적 산업정책’이라는,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엘리트들에게 조롱당할 정책 기조를 지금의 미국과 유럽 정부는 버젓이 채택했다. 그들은 ‘큰 정부, 유능한 정부’의 깃발을 들고 정부재정과 공공금융으로 기술혁신에 투자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주술에 가까운 건전재정 기조에 집착해 국가가 할 일을 외면한다. 내년 예산에서 재생에너지, 연구개발(R&D),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삭감했고 그만큼의 혜택을 고소득자와 대기업에게 세금 감면이라는 선물로 바친다. 따라서 현 정부의 통치는, 국민주권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귀족정인데, 미래 비전도 공적 사명감도 없고 국가 공유부를 소수 기득권층에게 챙겨준다는 점에서는, 굳이 말하자면 ‘강도귀족정’이다. 산업자본주의 시대 독점자본가의 행태를 꼬집던 이 말은 21세기 한국 정치에도 들어맞는다. 자신을 귀족이라 착각하지만 하는 일은 강도에 가까운 집단이 민주공화정을 아래로부터 무너뜨리는 중이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의 의도와 다른 뜻에서 널리 쓰이는 저 문장을 곱씹는다. 우리가 정치를 외면하면, 가장 저열한 자들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 기본소득정치를 어떻게 펼칠 것인가
‘기본소득정치’는 기본소득운동 안에서도 흔히 쓰는 말은 아니다. 2016년 이후 기본소득이 주류 정치권의 의제로 떠오르자 ‘기본소득정치’란 말도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주로 기본소득 정책을 내건 정치인이나 정당을 가리키며 사용하는 다소 의미가 모호한 표현이었다. 기본소득당이 이 표현을 가끔 썼지만 아직 시민권을 얻었다 하긴 어렵다.
하지만 기본소득정치의 의미는 학자들이 며칠씩 토론한다고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의 실현을 바라고 기본소득과 함께 재구성될 세계의 비전을 가진 정치세력이 성장할 때, 기본소득정치의 뜻도 명료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정치에선 기본소득당의 성장이 곧 기본소득정치의 성장이다. 기본소득당이 창당하고 이만큼 성장한 지금, 기본소득정치의 의미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을까?
8월 말 열린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BIEN congress. 비엔대회)에서 나는 ‘한국 기본소득운동의 정치적 도전’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 중 ‘기본소득당의 정치적 도전’이란 소주제하에 말한 내용이 바로 기본소득정치의 현재이자 앞으로의 방향이었다.
기본소득당은 창당 후 꾸준하고 끈질기게 성장했다. 용혜인 상임대표에 대한 언론의 관심 증가, 최근 크게 늘어난 당원 가입은 우리 당의 정치활동이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기본소득당 정치활동이 효과적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는 기본소득을 ‘사명 지향적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기본소득을 단순히 빈곤 대책이나 복지 정책으로 내놓는 대신, 한국이 직면한 다양하고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시민을 설득했다. ‘기본소득 탄소세’가 대표적이다. 기후위기의 주범 탄소배출을 줄이는 ‘탄소세’와, 그 세수를 시민에게 배당해 소득을 보전하는 ‘탄소배당(기본소득)’을 하나의 정책으로 결합했다. 기본소득으로 불평등과 기후위기 모두를 잡자는 것이다.
둘째,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넓은 정치연합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 선거 국면마다 기본소득을 공통공약으로 하는 정당 및 후보자들의 연대를 추진했다. 기본소득당의 당론은 전 국민 기본소득 도입이지만, 그렇다고 범주형·지자체형 기본소득이나 참여수당형 기본소득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당과 운동을 아우르는 ‘기본소득정치연합’으로 한국 복지정치의 다수파를 형성하고자 한다.
셋째, 기본소득의 공유부 철학에 기반해, 국민의 존엄과 안전의 문제라면 적극 개입했다. 혹자는 “왜 기본소득당이 기본소득 아닌 다른 의제에 힘을 쓰느냐”고 묻지만, 공유부 철학의 핵심은 비단 돈뿐 아니라 누구든 안전하고 존엄하게 살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 후쿠시마 핵오염수 투기 반대 투쟁에 당력을 쏟아 싸웠다.
종합하면, 기본소득정치란 기본소득제도 도입을 위한 입법 활동 정도로 축소할 수 없다. 기본소득정치는 시대적 난제의 해결책을 내놓는 정치, 시민의 평등한 존엄과 안전을 위한 정치다. 또한 보편적 소득 보장을 지향하는 여러 대안을 커다란 연대로 묶어내는 정치다. 우리 당이 해온 일이자 앞으로 하려는 일이다. 안으로는 윤석열 정부의 강도귀족정에 맞서, 밖으로는 기후위기와 글로벌 안보위기 같은 엄중한 도전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는 기본소득정치를 더 크게 더 뚜렷하게 펼쳐나갈 것이다.
- 기본소득정치 인커밍을 향하여
그런 취지에서 「인커밍」 3호의 주제를 ‘기본소득정치 인커밍’으로 정했다. 이 주제와 관련해 하나의 대담, 두 개의 인터뷰, 하나의 특별기고를 실었다. 용혜인 상임대표와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저자인 라즈 파텔 텍사스대 정책대학원 교수가 ‘기후정의와 돌봄혁명’이란 주제로 대담했다. 두 사람은 기후위기와 돌봄위기는 맞물려 있고, 기본소득이 둘을 관통하는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하지만 치열한 고민 끝에) 이른다.
두 편의 인터뷰는 인커밍편집팀의 오준호 공동대표 인터뷰, 그리고 오준호 공동대표의 알마즈 젤레케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 인터뷰다. 오 대표의 인터뷰는 최근 출간한 「사명이 있는 나라」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그는 책과 인터뷰에서 ‘녹색전환·혁신국가·평생배당’이란 세 키워드를 대한민국 전환의 과업으로 제안한다. 알마즈 젤레케 교수는 젠더와 돌봄의 시각으로 기본소득 이론을 구성해온 세계적 학자다. 비엔대회 기조발표자로 한국을 찾은 젤레케 교수는, 한국 기본소득운동과 기본소득당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별기고로는 ‘전환적 산업정책과 국민공유부기금’을 제안하는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수석연구위원의 글을 실었다. 유 연구위원은 탄소중립이나 디지털전환처럼 거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전환적 산업정책이 필요하며, 동시에 전환에 대한 투자가 불평등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국민공유부기금을 창설해 시민배당을 주자고 한다. 이 제안을 발전시키는 일은 기본소득정치의 과제일 것이다.
한편 이번 호 특집은 지난 8월에 열린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다. 비엔대회 슬로건이 ‘현실 속 기본소득’인 바, 기본소득을 현실에 가져오는 것도 좌절시키는 것도 ‘정치’다. 비엔대회 참가자들은 각국 기본소득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공유했고, 우리 당도 좋은 자극을 받고 또 주었다. 그래서 우리 당 발표자들이 참여한 세션의 참관기를 모았다. 이 후기들은 일종의 망원경이다. 그 렌즈로 독자들은 기본소득정치의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관기를 쓴 필자 하나하나가 기본소득정치의 씨앗을 키우는 활동가, 연구자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끝으로 ‘이슈 인커밍’에서는 용혜인 의원실이 준비하고 있는 2023년 국정감사 방향에 대해 김영길 수석보좌관이 정리했다. 이번 국감이 내년 총선에 국민이 윤석열 정부를 평가할 근거가 되는 만큼, 기본소득당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 중이다. 홍순영 동물·생태위원회 어스링스 위원장의 글도 중요하다. 홍 위원장은 정치가 ‘모든 생명을 대변하는 정치’로 확장될 때 인간을 위협하는 기후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3호는 본래 발행하기로 한 시점보다 두 달 가까이 늦어졌다. 비엔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기본소득당이 매달려야 했고, 대회 후 관련 기사를 써서 싣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다. 그래도 「인커밍」을 기다린 독자, 당원 여러분에게는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인커밍」은 앞으로도 시대적 과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기본소득정치의 미래를 펼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