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가을호 ③ [대담] 기후정의와 돌봄혁명 위한 기본소득 정치
[대담] 기후정의와 돌봄혁명 위한 기본소득 정치 - 용혜인, 라즈 파텔 / 양지혜
한국을 대표하는 기본소득 정치인 용혜인 대표와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저자이자 세계적 석학 라즈 파텔 텍사스대 교수가 7월 1일 국회에서 만났다. 라즈 파텔 교수는 6월 말 ‘2023 경향포럼’ 참석차 한국에 왔다가 용혜인 대표와의 만남에 흔쾌히 응했다.
라즈 파텔 교수는 책과 강연에서 자본주의가 자연과 노동력을 ‘저렴한 것’으로 착취했음을 비판해왔다. “돌봄은 가장 저렴하게 취급된 것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파텔 교수는 자본주의를 바꾸기 위한 ‘돌봄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돌봄혁명에 효과적인 정책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상임대표는 기후정의를 위해 싸우는 국회의원이다. 그가 기후위기 해법으로서 발의한 탄소세·횡재세 법안은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를 기다리고 있다. 용혜인 대표는 “기후위기와 사회·경제적 위기를 모두 해결하는 전환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7월 현재 용 대표는 8월에 열리는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 <기후정의와 기본소득 선언>을 제안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두 사람은 공통으로 기본소득을 지구적 위기의 해법으로 여긴다. 대담에서 두 사람은 기본소득이 ‘사회생태적 전환의 기반’이자 ‘돌봄혁명을 앞당길 열쇠’라고 의견을 모았다.
기본소득을 자동차를 구매하는 데에 쓴다면
용혜인 ‘2023 경향포럼’ 전후로 발행된 당신의 인터뷰를 반갑게 읽었다. ‘돌봄혁명’을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동감한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양육자이자 기본소득 정치인으로서, 기본소득이 성평등과 돌봄혁명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대안이 되리라고 믿는다.
라즈 파텔 ‘2023 경향포럼’에서 자본주의가 자연과 노동력에 제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연과 노동력을 저렴하게 착취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돌봄혁명과 기후정의 실현이 필요하다. 이번 대담을 준비하며 기본소득당이 추진하는 <기후정의와 기본소득 선언>을 접했다.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용혜인 기본소득이 사회생태적 전환의 필수적 요소이자, 기후정의를 위한 기반이라는 것이 이 선언의 요지다. 선언의 주요한 제안은 국가 차원에서 탄소배출에 과세하고, 대규모 공공투자로 기후정의에 부합하는 생산과 서비스를 창출하자는 것이다. 탄소세 세수와 공공투자 수익 중 일부는 기본소득으로 분배해서 기후정의와 불평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라즈 파텔 흥미로운 제안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받아 모두가 자동차를 구매하는 데 쓴다면, 기후정의에 반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우리가 원하는 전환에 어떠한 자원이 필요한지, 기본소득이 그러한 자원을 만들고 분배하는 일에 어떤 변화를 만들지가 중요하다. 기본소득이 시민 삶의 자율성 회복에 도움이 되려면, 반드시 사회생태적 전환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용혜인 이번 선언에는 ‘충분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점과 그 효과도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사회생태적 전환의 효과적 수단이 되려면 충분한 금액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생태적 성장 압박을 극복할 수 있다. 기본소득당은 기본소득이 기후위기를 심화하는 더 많은 소비와 생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생태적 전환을 위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프랑스에서 탄소세 부담에 반발하며 발생한 ‘노란 조끼 시위’를 기억하실 거다. 생태적 전환을 위해 소득불평등을 줄이는 사회적 전환을 동반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두 가지 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다.
라즈 파텔 (고개를 끄덕이며) 기본소득이 생존에 필수적인 사회 서비스를 대체해선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생존을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 공동체와 개인이 더 번영하게 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본소득이 사회 서비스의 확대 그리고 돌봄혁명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용혜인 동의한다. 기본소득당은 기본소득을 도입할 때 기존 사회 서비스의 후퇴가 없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당신이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연과 노동력에 제값을 치르지 않으며, 특히 돌봄처럼 삶에 필수적이면서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활동을 폄훼한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기본소득을 통한 사회생태적 전환은 돌봄혁명과 맞닿아야 한다.
돌봄이 ‘착취’가 아닌 ‘가치’가 되려면
라즈 파텔 당신은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 양육자 국회의원이라고 안다. 내가 제이슨 무어와 공저한 책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기후변화와 돌봄혁명을 주요하게 다룬다. 기후변화가 우리 몸과 사회와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기후변화에 의해 여러 질병과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는데, 특히 기온이 급격히 높아질수록 가정폭력이 증가한다. 그러므로 기후위기 해결 역시, 돌봄과 젠더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당신은 돌봄혁명에서 기본소득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나?
용혜인 나 역시 성평등하지 않은 사회에 돌봄노동과 재생산노동이 여성의 몫으로만 여겨지고 평가절하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는 ‘맘충’ 같은 표현이 있다. 돌봄노동을 하는 여성을 무능력하고 밥만 축내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임금노동 바깥의 다양한 활동과 여가가 존중받는 기반이 마련되면 여성의 자유도 확대될 것이다. 동시에 기본소득은 가정 혹은 개인적 관계에서 서로 돌볼 수 있는 시간과 조건을 보장한다. 그럴 때 돌봄이 여성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사회를 새로 구성하는 ‘가치’로 자리잡을 수 있다. 덧붙여 성평등한 사회와 돌봄을 위한 정책적 노력도 필요하다. 나는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와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주장한다.
라즈 파텔 노동시간 단축은 기후위기 대책도 된다. 노동시간 단축이 어떻게 기후정의로 이어지는지 시민들에게 잘 설명하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과제다. 말씀하신 아빠 육아휴직 의무제 또한 돌봄노동의 평등한 배분을 고민하며 제안했을 것 같다. 그런데 주4일제를 도입해도 여전히 육아를 여성이 주로 하면 기본소득 도입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방안이 있는가? 남성이 더 평등하게 돌봄노동을 수행하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용혜인 어려운 질문이다. 구조적이고 문화적 측면 모두 큰 변화가 필요하다. 먼저, 시장 내 돌봄노동의 가치가 올바로 평가되면 시장 바깥의 돌봄노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시장 내 돌봄노동의 가치를 향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임금노동 바깥의 돌봄 등 다양한 활동을 보장하는 사회로 가야 한다. 돌봄혁명을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소득과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라즈 파텔 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용혜인 그렇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한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아이를 함께 돌볼 사회적 관계와 기반이 매우 부족하다. 심지어 ‘노키즈존’이라 부르는 아동 출입을 금지하는 매장이 증가하며, 아동과 양육자에게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돌봄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고, 돌봄을 비가시화하고 비가치화하는 구조와 문화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라즈 파텔 미국에서도 술 파는 곳에는 미성년자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작은 마을들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 너무 없다고도 한다.
용혜인 한국의 ‘노키즈존’은 술집 같은 공간이 아니라 카페, 식당 등 일상적인 공공장소나 상업시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다. 어린이들이 시끄럽고 사고의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다.
라즈 파텔 그와 같은 의미의 ‘노키즈존’이 존재한다는 건 놀랍다. 물론 국가마다 양육 문화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유럽에도 국가마다 분위기가 다르던데, 이탈리아는 아이들을 아무 데서나 볼 수 있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데,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문화가 깊이 영향을 미친다.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용혜인 노키즈존은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대다수 사회구성원, 특히 청년세대는 안전과 존중을 보장받은 경험보다 배제와 낙오 그리고 생존경쟁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존재를 환대할 여유를 잃은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이는 청년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가 특히 사회적 관계가 취약한 젊은 세대에게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사회문화도, 양육자가 독박으로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도 나아지지 않을까?
라즈 파텔 동의한다. 충분한 수준의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노동량은 줄고 돌봄활동이 증가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돌봄에 투자할 역량을 확대하는 좋은 정책이라 생각한다.
대담을 마무리하며
라즈 파텔 교수는 “기후위기는 돌봄의 위기이자 자본주의의 위기”라며 “기본소득이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용혜인 대표는 “대한민국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어, 기후정의와 돌봄혁명의 모범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대담 후에도 용혜인 대표와 라즈 파텔 교수는 국회 경내를 산책하며 한국과 미국의 정치 현안, 전환 정치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용혜인 대표가 라즈 파텔 교수에게 소개한 <기후정의와 기본소득 선언>은 8월 26일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 ‘총회’에 상정되어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