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가을호 ⑤ [인터뷰] “유연한 전략으로 작은 승리를 쌓아가라” - 알마즈 젤레케 미 뉴욕대 상하이캠퍼스 정치학과 교수
[인터뷰]
“유연한 전략으로 작은 승리를 쌓아가라”
- 알마즈 젤레케 미 뉴욕대 상하이캠퍼스 정치학과 교수
인터뷰어 오준호(기본소득당 공동대표)
알마즈 젤레케 교수는 돌봄과 젠더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해왔다. 또 기본소득 운동 내 남성·백인 중심적 담론을 비판하며 소수인종과 페미니즘 시각에서 기본소득 이론을 구성해왔다.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에 기조발제자로 참가한 젤레케 교수를 오준호 공동대표가 인터뷰했다. 젤레케 교수는 오 공동대표가 발표자로 참여한 ‘전체세션 5: 한국의 기본소득’의 좌장을 맡았다. 이수미 미국 라번대(University of La Verne) 공공정책학 교수가 통역을 맡았다. 인터뷰는 8월 25일 금요일 이화여대 ECC관 강의실에서 진행했다.
* 알마즈 젤레케 교수에 대한 추가 정보는 웹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 (almazzelleke.com)
한국에 대한 당신의 인상은?
유엔 관련한 일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인 1970년대에 한국에서 몇 주를 살았다. 그 뒤로 한국에 자주 왔고 그래서 한국 문화와 음식이 친숙하다(젤레케 교수는 순두부찌개, 해물파전 같은 한국 음식을 즐긴다). 어릴 적에 본 한국이 지금까지 이뤄낸 경제 발전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건물 등 외형적인 것뿐 아니라, 교육이나 과학도 짧은 시간에 크게 발전했다. 정치적으로도 ‘동아시아 모델’을 넘어서는 예를 보여줬다. 동아시아 모델에서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가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지 논쟁이 있는데, 한국은 그럴 수 있음을 보여줬고 이점은 중국과 대비된다. 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의 성장은 경제, 교육,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증거다.
당신은 여성과 소수자의 시각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한다. 당신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핵심 이유는 무엇인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안이라서다. 자본주의는 돌봄 제공자(caregivers)의 노동에 바탕을 둔다. 누군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므로 다른 사람이 생산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후자의 노동에만 보상한다. 그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통합되지 못한 이의 노동도 중요하고 그 삶도 보호받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보호하지 않는 이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는 단순하고도 세련된 수단이다.
당신은 1960년대 미국 흑인 여성들의 ‘복지권 운동(welfare right movement)’, 1970년대 유럽의 ‘가사노동에 임금을(pay for housework)’ 운동을 종종 언급한다. 이러한 운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운동을 주도한 여성들은 직관적으로 기본소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학자들처럼 연구하고 토론회에 가서 배운 것이 아니다. 가난한 여성 특히 소수인종 여성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런 그들이 자발적으로 풀뿌리 운동을 통해 기본소득과 만났다는 점이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운동에 한계도 있다. 이 운동들은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Occupying Wall Street) 운동처럼 기존 권력과 제도의 비판은 잘했지만, 비판을 넘어 어떤 정치적 요구를 할 것인가 전략은 부족했다. 비슷한 사례로 1930년대 미국의 타운센드 운동이 있다. 타운센드 운동은 보편적 노령연금(universal pension)을 요구한 운동으로 굉장히 거대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 타운센드 운동은 1933년 의사 프랜시스 타운센드가 시작했다. 당시 67세의 타운센드는 대공황 시기 빈곤 노인의 삶을 목격하고 ‘60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백 달러 연금 보장’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전국에 타운센드 클럽이 수천 개나 생기고 회원이 2백만 명이 넘었다.)
타운센드 운동도 대중적으로 성공했지만 정치적으로 순진했다. 타운센드는 노령연금법을 통과시키려고 회원들에게 지역구 정치인에게 압력을 넣으라고 했다. 그런데 타운센드는 민주당과 공화당 가운데 중립을 택했다. 당시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보편연금 대신 문턱이 조금 더 높은 기여형 연금을 도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타운센드는 루즈벨트가 보편연금을 안 한다며 거세게 비난했고, 결국 루즈벨트 정부와 타운센드 운동 사이가 틀어져 서로 배척하게 됐다. 한국 기본소득 운동에 대한 나의 조언은 주요 정당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거다. 주요 정당과 연합전선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 운동이 고민하는 점이다. 원칙과 방향은 있어야 하지만 유연한 정치적 전략도 필요하다. 한국의 거대 양당은 둘 다 문제가 있지만 차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일부 진보파들은 이 차이를 활용하기보다 둘 다 비난하며 자기 차별화에 몰두하려 한다.
미국에도 젊은 사람들, 심지어 내 아이들도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똑같다’라고 한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정치를 하려면 독자적인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도 의미가 있다. 타운센드 운동도 비록 전략에서 부족함이 있었으나 그 운동이 압력을 넣었기에 (그들이 바란 대로는 아니지만) 노령연금이 도입될 수 있었다. 다만 자기 기반을 구축하면서도 연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다양한 소득보장 시범사업이 진행 중이고, 앤드루 양이 민주당에서 탈당해 만든 ‘전진당(The Forward)’이 기본소득 공약을 내걸었다고 들었다. 미국의 기본소득 운동은 희망적인가?
(* 앤드루 양은 2020년 미국 대선 전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모든 성인에게 매달 약 10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 공약을 제시해 큰 주목을 받았다.)
아니다. 현재 미국에 ‘기본소득 운동’은 없다고 본다. 많은 소득보장 실험이 진행되는 건 맞다. 그런데 개인이 아닌 가구 단위로 주거나, 소득 심사를 거쳐 대상자를 선정하거나 하는 식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 실험은 없다. 그 이유는 정부가 재정 지출을 정당화하려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범사업이 나쁜 건 아니다. 현재 사회보장 정책이 현물 중심이거나 조건을 많이 요구하기에 현금을 지급하고 조건을 없애는 방향으로 가면 좋다. 다만 이런 사업들이 큰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다. 앤드루 양이 2019년에 민주당 경선 후보로 기본소득 바람을 일으킨 것은 훌륭했다. 하지만 최근 전진당을 새로 만들어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앞으로’라는 구호를 걸었다. 이것은 타운센드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기본소득은 명백히 좌파(left) 의제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같이 비난하면서 마치 중도 의제처럼 말하면 안 된다.
최근 한국 광주시장이 ‘가사수당’ 정책을 제안했다. 가사와 양육에 참여하는 남녀에게 소액을 지급하는 정책이다. 지지자들은 사회가 가사와 양육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대자들은 포퓰리즘이라 비판한다. 기본소득 운동은 이런 정책에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기본소득 운동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아동수당을 요구한다. 그에 비해 이런 정책은 돌봄 제공자에게 조건적으로 주는 소득이다. 문제는 집안일을 하는 사람에게 수당을 주면 그들을 오히려 집에 가둘 수 있다는 점이다. 성별 분업을 더 강화할 수 있다. 성별 분업을 해소하려면 밖에서 하는 일과 집에서 하는 일을 각각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일을 적게 하고 가사를 나눠 하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조건적 수당들은 이론뿐 아니라 실제로도 성별 분업을 강화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씀인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러면 남자들은 여유 시간에 나가서 놀고 여자들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정책이든 모두에게 똑같은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로 설계하면 안 된다. 젠더의 측면을 고려하면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한국은 저출생, 인구 감소 등이 큰 문제이다. 동시에 그 해법으로 제안된 정책도 논쟁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에게 주거 혜택을 주는 정책은 비혼 청년이 불만을 느낀다. 기본소득당은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했는데 보수 기독교인들이 격렬히 반대한다. 성별 임금격차 등 젠더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반페미니즘 우파가 일정한 지지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 운동이 저출생, 젠더 불평등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여자들에게 물어봐라(웃음). 남자들이 앉아서 어떻게 출생률을 높일까 해봐야 소용없다. 한국 상황은 자세히 모르지만, 여러 나라 여성에게 물어보면 일도 하고 싶고 가정도 가지고 싶고, 그 균형을 원한다고 얘기한다. 파트너와도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기를 바란다. 따라서 여성에게 아이를 낳을래 말래 선택을 강요하면 안 된다. 여성들이 원하는 건 직업과 가정 둘 다 할 수 있는 사회 조건이다. 2019년에 경기도 수원의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보니,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은 모두 남자고 커피 나르는 사람은 여자더라. 그렇게 하는데 애를 낳겠나. 여성을 정치적 의사 결정에 포함하고, 정치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여야 한다.
성평등한 사회 조건을 만들어야 출생률도 개선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또한 교육에서 심한 경쟁도 저출생에 영향을 준다. 동아시아의 엄청난 교육열, 부모 중 한 사람이 자녀 교육에 달라붙어야 하는 상황에선 일과 양육 병행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이 그리고 부모들이 애를 낳으려 할까. 미국도 교육에서 경쟁이 심해졌다. 내가 클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 자녀들도 체험활동이나 개인과외를 안 시킬 수 없다. 교육에서 과열 경쟁을 낮추고 구조적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사회 전반을 바꿔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 변화 없이 출산율을 높이긴 어려울 것이다. 이때 기본소득이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돈을 매달 얼마 준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 젠더적 측면을 고려하여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성별 분업을 해소하고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기본소득을 잘 디자인해야 한다.
소중한 인터뷰 감사하다. 한국 기본소득당은 기본소득을 실현하고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응원의 말씀을 해주실 수 있는가?
한국 기본소득 운동도, 기본소득 정당도 무척 인상적이다. 기본소득당을 응원하면서 세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다. 첫째는 당 지지층 바깥의 사람들이 겁먹지 않도록 잘 설득하는 것이다. 당의 지지자를 동원하고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아직 낯선 이들을 밀어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기본소득당은 원내 정당이므로 기본소득 의제 외에 다른 정책들도 균형을 잘 맞춰야 할 것이다. 둘째, 작은 승리(small wins)를 쌓아가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완전한 관철만 주장하기보다, 이미 있는 제도들을 기본소득의 방향으로 조금씩 넛지(nudge. 살짝 밀기)하는 것도 필요하다. 타운센드 운동처럼 보편연금 아니면 다 반대하기보다 기존 소득보장 정책에서 조건성을 무조건성으로 바꾸고 대상을 가구에서 개별로 바꾸는 식의 변화도 의미가 크다. 셋째는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다. 일반 국민이 아는 개념을 가지고 그 의미를 바꾸는 것이다. 가령 ‘효율성’을 보수파는 조건을 붙여 지원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그 방식은 빈곤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돈을 적게 쓴다고 효율적인 게 아니면 진정한 효율성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저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싸워야 한다. 기본소득당의 활동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활동도 많이 기대하겠다.